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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세월호 침몰에서 참사 키운 부실 대응까지···‘비극의 재구성’

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71928201&code=940202&nv=stand



아직 끝난게 아니다.



사건·사고
[특별기획]세월호 침몰에서 참사 키운 부실 대응까지···‘비극의 재구성’
최민영 기자 min@ 송윤경 기자 kyung@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최종수정: 2014.05.14 12:00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119 신고전화’로 한 고교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달됐다. “살려주세요!”. 

전날 밤 9시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있었다. 당시 세월호에는 안산 단원고 2학년생 325명, 다른 승객과 선원 등 모두 476명(이 숫자는 아직도 불분명하다)이 타고있었다. 

4월16일 오전 9시 30분. TV화면 속 세월호는 수면 위에 떠 있었다. 국민들은 믿었다. “시간은 충분하다. 승객들은 순조롭게 구출될 것이다”라고. 그런데, 그런 믿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고라면 “무엇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위안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어른들은 세월호가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아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아이들이 죽어갈 때 국가는, 어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도대체 ‘이런 나라’가 어디 또 있을까. 승객 304명을 침몰하는 여객선에 남겨둔 채 선장과 선원은 도망을 쳤다. 구조·구난에 나서야 할 함정과 크레인선발은 ’안전상의 문제가 있다’ ‘승인이 안났다’는 등의 이유로 아예 출발을 않거나, 늑장 출발을 했다. 첨단장비 사용은 미루고, 도움을 주겠다는 외국의 제의는 뿌리쳤다. 아이들이 배 안에서 사투를 벌일 때 대한민국의 어른들은 폭탄주 술판을 벌이고, 실종자 명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식음을 전폐한 부모들 옆에서 라면을 먹고, 정부에 대한 비난에 ‘빨갱이’라며 색깔공세를 폈다. 대한민국 언론은 ‘앵무새’처럼 확인도 안된 정부 발표를 그대로 내보냈다. 일부는 치명적 오보였다. 그러는 사이 304명의 아이들과 국민들은 차례로 숨져갔다. 

‘대한민국’은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미래를 꿈꾸던 아이들과 함께 ‘국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거친 ‘맹골수도’에 잠겨버렸다. 

국민 모두는 ‘먹먹’해졌다. 진도로, 안산 단원고로, 서울광장으로 수백만명이 달려가 추모하고 울고, 노란 리본을 달고…. 그런데도 슬픔은 사라지지않는다. ‘지켜주지 못한 죄’ ‘살려내지 못한 죄’ ‘살리려고 죽을 힘을 다하지 못한 죄’…. 온 국민 모두가 우울증에 빠져있다. 

대한민국은 ‘2014년4월16일’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 전문가들은 “세월호 참사가 1997년 외환위기 때와도 같은 상흔을 남길 것이며, 충격의 수준은 6.25 전쟁이 남긴 것에 맞먹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에 수십 년간 누적돼온 모든 치부를 ‘날것’으로 드러냈다. 

무능한 정부, 비겁한 정권, 부패한 자본, 소명의식 없는 언론이 이 모든 참사를 함께 만들어냈다. 눈물을 가슴에 묻고 우리는 이번 사건을 찬찬히 짚어보려 한다. 잃은 아이들과 이웃들을 위해 언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추모이자, 살아 돌아와준 아이들을 위한 변화의 시작으로 삼고자 한다. 

이 기사는 완결된 기사가 아니다. 앞으로 세월호 참사의 실체가 드러나는 대로, 우리는 사건이 잊혀지지 않도록 한 땀씩 이 기사에 덧댈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의견들을 모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기억해야 한다. 

Q. 4월16일 오전 8시49분(변침)~11시18분(침몰), 149분간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①학생들은, 4월 16일 오전 8시49분 부터 오전 10시17분까지 88분간 어른들을 믿고 기다렸다.

오전 8시49분.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45도 급변침 후 급감속 했다.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구조된 승객들의 육성 증언을 들어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8시40분쯤 두어번 배가 크게 기울어졌는데 10분쯤 지나자 갑자기 급격하게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전 8시52분. 단원고 학생인 최모군은 전남소방본부에 첫 신고를 했다. “살려주세요.” 최군의 첫 마디는 다급한 구조 요청이었다. 

JTBC가 지난 9일 보도한 방송을 보면, 고 김시연양의 휴대전화에 찍힌 영상이 있다. 오전 8시56분쯤 한 학생이 “우리는 진짜로 죽을 위기야. 이 정도로 기울었다. 오늘은 4월 16일”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선내에 계신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잡을 수 있는 봉이나 물건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나왔고, 학생들은 “야, 미쳤나봐” “이런 상황에서 막 그러지 않냐? 안전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면 지들끼리 다 나가고” “지하철도 그렇잖아. 안전하니까 좀만 있어달라고 했는데, 진짜로 좀 있었는데 죽었다고. 나간 사람들은 살고” 등의 말을 주고받지만, 안내방송에 따라 기다렸다.


오전 9시. 학생들은 서로에게 구명조끼를 건넸다. 학생들은 기울어진 배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등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구명조끼 입어, 너도”, “내것 입어”, “(선생님) 조끼 입으셨어요”, “사랑해”, “살아서 보자”…. 

오전 9시30분쯤. 경향신문이 단독 입수한 동영상을 보면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개인 사물함 아래 피해 있다. 선내방송에서는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의 안내 메시지가 전해졌다. 

뉴스타파의 보도를 보면, 고 박수현 군은 사고 당일 오전 8시52분부터 15분 분량의 동영상과 40여장의 사진을 남겼다. 동영상 속의 박군과 다른 학생들은 “배가 기울어졌다”, “죽기 싫다”, “동생은 수련회에 가지 말라고 해야겠다”, “선생님은 괜찮으시대”, “구명조끼는 다 입었어?” 등의 말들을 주고 받지만, “이동하지 말고 대기해주십시오”라는 방송을 믿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전 9시38분. 승객들의 카카오톡 메시지에는 “해경이 왔다. 움직이면 안된다. (언론에) 속보 떴다”는 내용도 담겼다. 

탈출한 단원고 2학년 ㄱ양은 “안내방송에서 침착하게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지시해서 방송을 믿고 선실에서 기다렸다”면서 “그 말만 믿고 끝까지 기다린 애들은 못 나왔고 나와 친구들은 침몰할 것 같아서 기어 나왔다. 그래서 살았다”고 말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인 고 박수현 군이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8장 가운데 하나. (출처=jtbc)



경향신문이 입수한 단원고 학생들의 카카오톡 메시지에도 당시 상황이 담겨 있다. 2학년 어느 반의 단체방. 한 학생이 “아직 다친 애들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전하자, 담임 교사는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교사가 다시 “얘들아. 살아서 보자”라고 메시지를 전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사랑합니다”라고 답했다. 

JTBC가 공개한 동영상 속에는 단원고 학생 김모양의 간절한 마지막 기도가 담겨 있었다. "우리반 아이들 잘 있겠죠? 선상에 있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진심입니다. 부디 한 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수학여행) 갔다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이 기도는 김양의 마지막 기도가 되었다.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단원고 학생, 교사들에 의해) 마지막으로 전송된 카카오톡 메시지는 10시17분이었다”고 밝혔다. 마지막 메세지는 한 학생이 보낸 것으로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방송은 안나와요” 였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고 박수현군이 오전 10시11분45초에 촬영한 마지막 사진은 객실 입구 쪽 모습을 비추고있다. 이 시각은 해경이 구조를 시작한 9시30분보다 40분이 지난 시각이다. 아이의 표정은 굳어져가고 있었다.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이 사고 직후인 오전 9시30분쯤 촬영한 동영상.





②선원들은,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배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4월16일 오전 8시49분. 세월호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기관장 박모씨는 조타실 직통전화로 기관실에 탈출을 지시했다. 선원들은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와 교신하면서 “지금 배가 많이 넘어졌습니다. 빨리 좀 와주십시오.”(8시55분)라고 하면서도 선내 방송으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했다.

오전 9시01분. 선원 중 한 명은 휴대전화로 청해진해운에 사고 보고를 했다. 탈출 및 구조활동을 지휘해야 할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들은 그 시각 청해진해운과 7차례 통화를 했다. 7차례 통화 중에 승객 구조에 대해 주고받은 내용은 없었다.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전화를 주고받은 직원과 선원들이 모두 배 침몰 상황에 대해서 만 대화를 주고받았고 승객 구조 등에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밝혔다.청해진해운 측도 선장과 선원들에게 “배가 왜 넘어갔느냐”, “어쩌다 사고가 났느냐”, “배에 무슨 일이 있느냐”며 배의 상태만 물어봤다. 인천항 운항관리실도 세월호에 전화를 걸어 상황만 문의하고 말았다.

선원들은 승객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전용통로로 이동해 집합해 있었다. 이들은 제복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오전 9시25분. 진도 VTS에서 “선장이 판단해서 인명 탈출을 지시하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선원들은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은 바로 구조할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라고 답신했다. 

오전 9시30분. 해경 경비정 도착했다. 세월호는 45도쯤 기운 상태였다. 선원들은 조타실·기관실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학생들은 ‘어른들의 안내방송’에 따라 객실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각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포해경 123정이 세월호의 좌현에 접근해 구조를 시작했다. 경비정에 탑승했던 해경은 방송으로 “바다로 뛰어내리라”고 지시했다. 

오전 9시46분. 속옷 차림의 이준석 선장이 구조됐다. 나머지 선원 15명도 해경이 던진 밧줄 타고 구조됐다. 

선박직 선원 15명 중 단 한 명도 승객을 구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박모 기관장은 탈출을 위해 5층 조타실에서 3층으로 내려오면서 단원고 학생들이 많이 타고 있던 4층을 그냥 지나쳤다. 

당시 선박직 선원들은 동료 승무원 2명이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이들을 내버려 둔 채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당시 해경 어업지도선이 촬영한 동영상.



배를 버린, 그리고 구조를 기다리던 학생들을 버린 세월호 선원들은 16일 오후 진도읍 실내체육관으로 옮겨진 뒤 한 외식업체가 마련한 곰탕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뒤 커피까지 마시고 자리를 떴다. 반면 구조된 학생들은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친구들이 오면 같이 먹겠다”며 함께 탈출하지 못한 친구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자원봉사자 허모(47·여)씨는 “나중에 TV 방송을 통해 이들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원들이란 걸 알고 울분이 일었다”고 말했다. 

이준석 선장은 오후 2쯤 전남 진도의 한국병원으로 이송돼 찰과상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태연한 모습으로 바닷물에 젖은 5만 원짜리 두세 장과 1만 원짜리 10여 장을 치료실 온돌침상에 말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들이 죽어갈 때, 어른들은 배를 채우고 돈을 아끼는 것이 우선이었다. 

21년 전인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당시 선박직은 모두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불과 20년 사이,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책임자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신의 목숨만 챙겼다. 이들에게 승객은 책임져야 할 소중한 생명이 아니라 단지 ‘숫자’에 불과했다. 그들은 맹골수도에 ‘숫자’들을 버리고 온 것이다.

세월호 조타수 오보씨 인터뷰 영상(그것이 알고싶다 캡쳐)



세월호 조타수 오보씨 인터뷰 영상(그것이 알고싶다 캡쳐)



세월호 조타수 오보씨 인터뷰 영상(그것이 알고싶다 캡쳐)



③해경과 군 당국은 오전8시52분 ‘학생의 첫 신고’ 후 152분이 지나서야 여객선 진입 수색을 벌였다. 그마저 실패했다. 

안산 단원고 최모군으로부터 첫 신고가 들어온 시각은 4월16일 오전 8시52분. 세월호가 제주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신고한 시점은 이보다 늦은 오전 8시55분이다. 모든 선박은 조난과 긴급상황을 대비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공용채널 ‘VHF 16번’을 켜두지만 세월호는 이 채널을 사용하지 않았다. 제주VTS 역시 세월호로부터 첫 신고를 받은 뒤 12번 채널을 고집하다 통신이 잘 되지 않자 21번 채널로 바꾸기도 했지만 끝까지 양측은 공용채널인 16번은 사용하지 않았다. 공용채널로 교신했다면 해경을 포함해 사고 현장 인근의 모든 선박이 상황을 곧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제주VTS로부터 전화로 상황을 전달받은 진도VTS는 9시6분부터 37분까지 세월호와 교신했다. 

첫 신고후 14분이 지나서야 공용채널을 통해 주변 선박들이 세월호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첫 신고 후 38분이 지난 오전 9시30분. 해경 항공구조단 소속 특공대원들이 탑승한 소형 헬기가 제일 먼저 사고해역에 나타났다. 5분 뒤 목포해경 경비정 123정(110t)이 도착했다. 경비정이 구조작업을 시작한 오전 9시 36분 당시 세월호는 왼쪽으로 60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지만 3층부터 시작하는 객실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 이 때까지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승객들이 선실에 있었다. 세월호 침몰사고 검경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는 "해경이 처음 도착한 9시30분에 세월호는 45도 가량 기울어져 있었을 뿐"이라며 "해경이 (이때 세월호에) 진입해 구조했으면 (세월호 승객) 전원이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해경은 ‘이미 배가 기울어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9시44분 한 경사는 갑판에 올라 객실 쪽에서 구명 뗏목을 향해 걸어간 뒤 3분만에 2개를 발로 차 바다에 떨어뜨렸다. 선내에 진입해 승객들에게 탈출을 충분히 지시할 수 있는 시간이다. 123정은 ‘승객 여러분 총원 바다로 뛰어내리십시오’라는 방송을 반복했다고 했지만 해경이 공개한 동영상에는 헬기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사고해역에 출동한 123정은 전문 구조요원이 없는, 육지로 치면 경찰 순찰차나 마찬가지다. 해경 구조전문 인력인 122구조대가 사고 해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24분이었다. 112 구조대는 차량을 타고 70㎞를 이동한 후 배를 타고 현장에 접근하는 데 2시간 20여분이 걸렸다. 대형 헬기로라도 전문 구조요원들을 초기에 집중 투입했어야 했다.

해경과 군 경비정 9척은 9시30분부터 11시까지 순차적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해경의 상황 보고서를 봐도 선내에 진입해 선실 등에 갇혀있는 승객들의 탈출을 도운 정황은 없다. 오전 11시24분 목포 해경구조대 4명이 여객선 진입 수색을 한번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세월호는 11시18분쯤 선수 일부만 남기고 완전히 전복돼 침몰했다. 



전국 재난정보를 실시간 수집·전파하는 안전행정부 중앙안전상황실(상황실)은 세월호 침몰사고를 언론보도를 통해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확인됐다. 안행부 외청(外廳)인 소방방재청이 인명구조를 위해 헬기를 출동시킬 때까지도 침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깜깜이’ 상황이었다. 또 경찰청·소방방재청·해양경찰청 구조인력이 현장에 도착한 다음에야 청와대·국무총리실 등에 사고 발생 사실을 전파했다.


④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의 손을 잡아준 어른들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크레인선은 세월호가 물에 잠기는 속도를 늦출 수있었다. 그러나 승인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차가운 물 속의 아이들이 버텨낼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어른들은 느리게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크레인이 17일 밤 11시40분쯤이었다. 총 5대의 크레인이 출동했지만 사고수습본부는 아무런 활용도 하지 못했다. 10여일 만에 크레인들은 성과 없이 현장에서 철수했다. 

해군의 첨단구조함 ‘통영함’에 걸었던 희망도 사그라졌다. 1590억원이나 들여 건조해 지난해 10월 인수받기로 한 함정이 사고 시점에 조선소에서 덩그러니 잠자고 있었다. 

배가 더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리프트백(공기주머니)을 설치하는 방안은 6800t이라는 세월호의 무게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아이들이 잠긴 곳을 알려주는 부표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찍 설치했더라면, 가라앉는 속도라도 늦출 수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고해역 인근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 함정이 구명용 보트를 탑재한 구조 헬기를 보냈지만 해군이 승인을 하지 않아 되돌아갔다. 국방부는 “선체가 대부분 침몰한 상황에서 한국 공군 항공기를 비롯한 다수의 헬기들이 집중 운영되고 있어 원활한 구조 작전을 위해 일단 귀환해, 추가 요청에 대기하도록 요구했다”고 해명했다. 그동안 안전행정부와 해양부, 교육부를 비롯한 각 정부기관들의 대책본부는 우왕좌왕 했다. 사망자과 실종자 숫자도 파악하지 못했다. 

Q, 사고 초기 ‘아무것도 하지 못한 대한민국’, 무엇이 희생자 가족과 국민들을 더 먹먹하게 했는가?

①아이들의 구조를 기다릴때 어른들의 망언과 만행이 이어졌다.

새누리당 세종시장 후보인 유한식 현 시장은 18일 폭탄주와 헹가레를 곁들인 술판을 벌였다. 한기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서)“좌파 단체를 색출해야 한다”고, 같은 당 소속의 권은희 의원은 “좌파들이 선동한다”고 몰아세웠다. 해경 간부는 “80명 구하면 대단한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가 직위해제 됐다. 사고 책임자 중 한 명인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실내체육관의 의료용 탁자 위에서 즉석라면을 먹어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난을 샀다. 안전행정부 송영철 국장은 사망자 명단이 적힌 상황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려다 실종자 가족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라면 먹는 서남수 교육부 장관. (출처= 오마이뉴스 )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는 재난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며 ‘발뺌’을 했다. 지지부진한 구조작업에 지친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가겠다며 진도 거리로 나섰을 때 경찰은 채증 동영상 카메라를 들이대며 길을 막았다. 



② 정부의 무능·무책임, 거짓발표, 언론의 무검증 속보 경쟁…실종자 가족들을 분노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당일부터 구조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탑승자 수와 구조자 수가 여러 번 뒤바뀌었고, 구조자 명단에 올랐던 딸이 다시 실종자 명단에 올랐다. 전남 진도 체육관에 실종자 구조·수색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화면이 설치된 것은 지난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간 뒤였다. 박 대통령이 체육관에 들어서자 실종자 가족들은 박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를 살려달라고 빌었고,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여기 오지 말고 (현장에서) 지휘하라고!”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정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통해 사고를 수습한다며 나섰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현장에서는 이뤄지지 않은 부풀려진 ‘수색작업 발표’가 이어졌다.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당일, 날씨가 나쁘지 않았는데도 왜 총력을 다해 구조하지 않았는 지 따졌다. “왜 잠수부를 수백명이나 불러놓고 수색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해경 관계자는 “조류가 거세 구조작업 진행이 어려우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만 했다. 

하지만 해경은 맹골수도의 물살이 약해지는 시간인 '정조시간'을 착각하고 있던 것으로 이후 드러났다. 가장 물살이 셀 때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국립해양조사원은 "맹골수도는 일반 연안의 정조시간과 차이가나는 지역"이라는 정보를 해경에 전달했으나 해경은 이같은 정보를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가족들은 지난 4월18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현장에는 책임을 지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상황실 조차 마련돼지 않았다고 당국의 대처를 비판했다. 가족들은 “현장을 방문했을 때 헬기 2대, 배는 군함 2척, 경비정 2척 특수부대 보트 6대, 민간 구조대원 8명에 불과하고 인원도 200명도 안됐지만 정부는 인원 555명, 헬기 121대, 배 69척을 투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당일부터 다양한 구조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인 것도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아이들의 생존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아 침몰된 선박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③ 박근혜 대통령의 뒤늦은 사과…그러나 희생자 가족들은 ‘사과가 아니다’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29일 국무회의에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 “이번 사고로 많은 고귀한 생명을 잃었는데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고 마음이 무겁다”며 사과했다. 사고 발생 13일 만이었다. 하지만 대국민사과가 아닌 국무회의 중 발언이었다. 세월호 사고 유가족 대책위원회는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사과한 것을 두고 “5000만 국민이 있는데 박 대통령의 국민은 국무위원 뿐인가. 비공개 사과는 사과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날 정부합동 분향소에 나타난 박근혜 대통령은 조문만 했고 사과를 하지 않았다. 성난 유족들은 ‘여기까지 와서 사과 한마디 안할 수 있느냐’고 거칠게 항의했다. “대통령님, 우리 새끼들이었어요. 끝까지 현장에 있으셨어야죠 그거 아니예요? 왜 서로 미뤄요? 우리 딸하고 9시48분까지 통화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웃더라고요”. 박 대통령이 떠난 뒤 대통령의 조화는 분향소 밖으로 치워졌다. 국민의 분노는 높아져만 갔고, 새누리당 지지율의 바탕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과반 이하로 추락했다. 그리고 6.4 지방선거를 한달쯤 앞둔 5월 6일, 박 대통령은 석가탄신일 조계사 법요회에 참석해 다시 한 번 사과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국민사과의 형식은 아니었다.



단원고 유가족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사과발언을 ‘사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위 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화환은 유족들의 항의 속에 이름이 보이지 않도록 뒤로 돌려졌다. 이 화환은 끝내 현장에서 철수됐다. (아래)



④ 대한민국 언론은 속보 경쟁에 매몰됐다. 

4월 16일 오전 11시9분. 안산 단원고를 관할하는 경기도교육청은 기자들에게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발송했다. 확인 결과 잘못된 정보였다. 교육청 담당과에서 학교에 문의한 뒤 전원 구조됐다는 말을 듣고 이를 대변인실이 기자들에게 전달했고, 속보에 목말랐던 언론은 교육 당국의 이같은 발표를 확인취재하지 않고 받아쓰기 식으로 기사화했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전원 구조될 것 같다”는 해경 관계자의 말을 학교 관계자가 “전원 구조됐다”고 잘못 알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해경의 발표는 따로 놀았지만, 언론은 이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보냈다. 구조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던 실종자 가족들에 가해진 ‘희망고문’이었다. ‘대대적인 수색’, ‘잠수인력 500여명 투입’ 등,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발표가 언론에 그대로 실렸다. 

4월18일 오전 열린 대표자 회의에서 실종된 단원고 학생 학부모들은 “기자들을 믿을 수 없다. 생존자가 있다는 말을 목이 쉬도록 했어도 왜 기사를 안내 주느냐. 촬영도 하지 말고 모두 나가라”며 항의했다. 

언론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예의가 부족했다. ‘그림거리가 되는 피사체’인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인터뷰이’인 생존 학생에게 “친구가 죽었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냐”며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언론은 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기삿거리’로 대했다. 사람이, 생명이, 언론에게는 ‘이익’과 ‘명성’을 가져다줄 수단이었던 것일까. 
일부 언론은 실종자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편집’하면서 정권의 이익과 야합했다. MBC는 "실종자 가족들이 '해양수산부장관과 해경청장을 압박'하고 '총리에게 물을 끼얹고''청와대로 행진'을 했다면서, '잠수부를 죽음으로 떠민 조급증'이 아니냐"며 비난했다. 김모 KBS 보도국장은 "세월호 사고 사망자가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유가족들의 거센 사과 요구를 받았다. 

대형 언론사 중에서도 믿을 언론 매체가 거의 없었다. 언론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가 실종된 한 학부모가 시신 확인실 천막 앞에 쓴 글. “어찌 이렇게 참담할 수가 있습니까. 부모의 입장에서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너무도 아프고 또 아프기만 합니다”면서 “저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현재 살아있다는 자체가 부끄럽기만 합니다”고 적었다. 그는 “계속되는 인재에도 재난대비 매뉴얼도 없고, 지휘체계는 엉망진창에다 거짓말만 일삼는 이 무능한 ‘정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Q. 부실과 무능함으로 일관한 해경이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세월호 참사는 ‘화물 과적’과 화물을 고정하는 작업인 ‘고박 불량’이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 승객은 나몰라라 하고 제 목숨 챙기기에만 급급한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화를 키웠다. 여기에 초동 대처와 이후 구조·수색 작업에서 부실과 무능함으로 일관한 해경도 결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①세월호가 물에 잠기기까지 2시간 동안 해경은 무엇을 한 것인가. 

세월호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구조대는 어선단속정 123정이었다. 그 곳엔 구조전문인력은 없었다. 해경은 123정에게 현장지휘 임무를 맡겼다. 123정측은 세월호와 진도VTS간의 교신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채널도 청취하지 않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해경은 오전 8시58분 서해청은 신고를 접수한 직후 목포항공대 기지에 ‘헬기를 이용해 수중 구조작업에 탁월한 특공대를 현장에 급파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목포항공대 헬기(B511)는 항공구조사 2명만 태우고 사고해역을 향해 이륙한 뒤였다. 나머지 2대의 헬기 중 1대(카모프)는 수리 중이었고 다른 헬기(B512)는 중국어선의 불법어업 단속을 위해 가거도 해상에 출동한 3009함에 탑재돼 있는 상황이었다. 

특공대원 7명이 전남지방경찰청 헬기와 다시 민간 어선으로 갈아타고 사고해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15분. 이미 세월호는 뱃머리 일부만 남긴채 물속에 잠겨 특공대원들이 선내에 진입할 수 없었다. 가장 신속히 현장에 도착해 인명 구조를 펼쳐야 했던 해경 특공대는 타고 갈 헬기가 없어 출동이 늦어졌고 세월호 침몰 위치를 표시하는 부표만 매달고 철수해야 했다.

해경에서 급파한 ‘구조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객실 창문 쪽에선 흰색·붉은 색 물체가 부정기적으로 보이는 장면이 해경 공개 동영상에서 포착됐다. 사람들은 탑승객 누군가가 배의 유리를 집기로 깨려 시도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배의 창문은 이내 검은 물살에 덮혀갔다. 당시 객실에 있던 아이들을 포함한 승객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그리고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9시35분쯤 해경 123정이 해역에 도착한 모습. 그러나 갑판에 나와있는 승객은 아무도 없다. (해경 동영상 캡쳐)



해경이 못보고 지나친 객실 SOS (JTBC 캡쳐)



해경이 못보고 지나친 객실 SOS(JTBC 캡쳐)



4월16일 123정 구조영상

4월16일 오전 9시32분 모습



②해경 지휘부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해상사고가 발생하면 중앙구조본부장은 해양경찰청장이 맡게 돼 있다. 그런데 인천 송도에 위치한 해경 종합 상황실을 지휘해야하는 김석균 해경청장은 세월호 침몰 당시 헬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그 사이, 그러니까 사고를 수습할 지휘관이 헬기 속에서 이동하는 사이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했다. 

사고의 정황을 밝힐 수 있는 진도 VTS 측과 세월호의 교신 내용을 해경은 미루다가 뒤늦게 공개했다. 그런데 공개된 교신내용 일부가 삭제됐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팀이 만난 전문가는 공개된 ‘세월호와 진도VTS 교신내용’의 일부가 끊겨있다고 지적했다. “덮어 씌운다든가 아니면 두개가 혼합이 됐든가 의도적으로 편집됐을 가능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해경 측은 이같은 의혹에 대해 부인했다. 

사건 직후인 17일 세월호 이준석 선장을 해경 관계자가 자신의 집에서 재운 정황 등이 확인되면서 해경이 청해진해운 측과 사건을 놓고 ‘입맞추기’를 시도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③인명구조 명령은 없었다.

해경이 세월호 사고 이후 인명구조와 관련해서는 공식적으로 명령을 발동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난된 선박을 인양하는 구난과 달리 구조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개념이다. 사고 초반부터 선박을 인양한다며 3차례 구난(인양) 명령을 발동한 해경이 정작 사람 목숨을 구하기 위한 구조 명령은 한 차례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세월호 실종자 구조작업에 투입된 민간회사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



④‘언딘 마린 인더스트리’라는 일개 기업이 UDT/SEAL, SSU와 같은 군 정예요원의 구조작업보다도 먼저였다.

세월호 구난작업을 현장에서 사실상 주도, 장악한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와 해경은 어떤 관계인가. 해경은 그동안 ‘언딘’ 위주로 구조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데 대해 “관련 법규에 따라 구난 조치를 해야할 의무가 있는 선박 소유자가 조치를 취한 것으로 결자해지 차원”이라고 설명해왔다. 선박 소유자인 청해진해운이 언딘과 계약한 것이며 해경은 언딘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시사인’의 지난 5월 1일 보도를 보면, 청해진해운은 애초 언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해경 담당자가 ‘언딘이라는 업체가 있는데 벌써 구난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청해진해운 쪽에 계약하라고 말했다”고 청해진 해운 관계자는 증언했다. 

‘언딘’은 민간 잠수업체로 심해 잠수 전문 구난업체다. 이 업체는 이명박 정부 들어 집중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2012년에는 5760만원, 2013년에는 2억3409만원의 국고보조금을 받았다. 언딘은 이명박 정부에서 지분투자도 받았다. 정부가 투자한 펀드가 언딘 지분의 29.92%를 차지한다. 언딘의 대주주는 지분의 64.52%를 갖고 있는 김윤상 해양구조협회 부총재다. 해양구조협회는 해양경찰청의 법정단체다.

언딘 측은 특혜논란 속에 '돈벌이 집단'이라며 여론의 비난을 받자 구조작업에만 참여하고 선체 인양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5월 8일 밝혔다. 

지난 2010년 UDT/SEAL 대원들이 침몰한 천안함 수색작업 준비를 하는 모습



언딘 주주 및 지분



Q. 청해진해운을 둘러싼 의혹은 뭔가.

①세월호는 온전하지 못한 배였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 해운은 추락한 기업윤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고발생 당일인 16일 오전 9시 1분부터 40분까지 세월호 선원들은 청해진해운 간부들과 7차례에 걸쳐 전화통화를 했으나, 승객 걱정보다는 배 걱정이 먼저였다. 

청해진 해운의 물류팀장은 배가 가라앉고 있던 4월16일 오전 9시38분, 화물량을 180t 줄여 컴퓨터에 입력했다. 세월호가 실을 수 있는 최대적재 화물량은 1070t이었으나, 사고 당일에는 그 세 배에 달하는 3608t의 화물과 차량을 싣고 있었다. 그만큼 배의 균형을 잡아줄 ‘평형수’는 4분의 1밖에 채우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배에서 탈출하던 시간, 회사는 과적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세월호는 온전한 배가 아니었다. 일본 마루에 페리사가 18년간 사용해온 선박을 들여와 “차량 출입구 문을 잘라내 앞부분은 가볍게 했고 선미 쪽 상부는 객실을 늘려 무게가 200여t 더 늘어나면서 무게중심이 뒤틀어졌다”고 세월호 운항경험이 있는 한 1등 항해사는 증언했다. 증개축으로 승선인원은 804명에서 921명으로 117명 늘어났지만, 이로 인해 무게 중심은 구조변경 전 11.27m에서 구조변경 후 11.78m로 51㎝ 높아졌다. 이 때문에 배의 균형이 흔들릴 때 필요한 “복원력이 당초 설계보다 많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선원들 사이에서도 세월호는 기피대상이었다. 선원들은 평소 “화물이 너무 많아서 배가 가라앉을 위험이 있다”고 해운사 측에 알렸지만 청해진 해운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화물을 배에 고정하는 결박조치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술했다. 안전한 운항보다는 이익 극대화, 즉 ‘돈’이 먼저였다. 

“생매장된 우리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 신혼부부와 유학생, 이주노동자까지. 분향소에서 이 무거운 죽음을 느낄 수 없어 가슴 아팠다. 우리가 죽인 300여 희생자들께 이 그림을 바친다.(만화가 고경일 교수)” (출처=트위터 서해성 @jiksseol)



② 이렇게 위험한 배를 감독해야 할 기관은 그동안 무엇을 했나. 

연안 여객선에 대한 선원 안전교육과 입출항 안전점검은 한국해운조합이 맡아왔다. 그런데 이 단체는 감독기관보다는 이익단체다. 2100여개 선사들이 회비를 내는 단체가 선사들을 상대로 깐깐한 감독을 하기는 어렵다. 3년 전에는 내항여객선 안전관리 업무를 분리해서 별도의 조직을 설립하자는 입법시도가 있었으나, 예산이 드는데다 안전관리는 선사 자율에 맡기는 게 국제추세라는 이유로 당시 이명박 정부가 반대해 무산됐다. 정부가 안전 관련 업무를 무분별할 정도로 민간단체에 위탁한 것이 결국 세월호 참사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이익단체와 정부와의 결탁에는 ‘낙하산 자리’라는 거래가 있었다. 한국해운조합은 퇴직한 해양 및 교통관련 관료들을 이사장으로 영입해 방패막이로 삼고, 현직 공무원은 나중의 자리를 생각하며 해운조합의 문제를 묵인하는 일종의 커넥션이 형성됐다. 

해운조합은 검찰의압수수색에 대비해 지난 4월 23일 내부 문건을 대량 파기하고 일부 컴퓨터를 교체하거나 자료를 삭제한 증거인멸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해운조합이 ‘인선회’라는 단체를 통해 정·관계에 로비를 하고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의혹과 관련한 서류를 파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③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청해진해운 특혜의혹 

청해진해운이 2012년 일본 마루에 페리사로부터 세월호를 사들인 금액은 116억원인데 산업은행이 100억원을 융자해주었다. 정책금융에 의존해 사실상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세월호를 수입한 것이다. 산업은행은 “청해진해운이 충분히 상환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특혜 의혹이 제기된다. 계약대로 7년 안에 100억원의 원리금을 상환하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청해진해운의 재무상태는 나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슷한 시점에 이명박 전 정권은 규제를 완화하면서 여객선의 운항연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려주었다. 여기에서도 특혜 의혹이 제기된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와 오하마나호, 두 대의 여객선으로 인천-제주 노선을 독점운행해왔다. 제주도를 오가는 화물로 많은 수익을 냈고, 운송가격을 올렸는데도 매년 적자가 났다. 업계 관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청해진해운 소속 직원들의 임금수준은 업계에서도 짜기로 소문났다. 

그런데 청해진해운은 두 쌍둥이 배를 지난 2월과 3월에 걸쳐 잇따라 국제시장에 중고매물로 내놨다. 새로운 선박 매입을 위한 사전준비였는지, 아니면 배의 문제를 알고 팔아 정리할 계획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본 마루에 페리로부터 사들인 18년된 페리선(사진 위)을 청해진 해운은 세월호로 국내에서 운행하면서 선실을 증축하는 등 배를 개조했다. (아래)



④ 의심받는 청해진해운과 해경 간 커넥션

이용욱 해경 정보수사국장은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학생’으로 알려지면서 지난 5월 2일 경질됐다. 해운업을 바탕으로 기업을 키운 유 전 회장이 해경 내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국장은 7년간 청해진해운의 모회사인 세모그룹에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회사에 다니면서 딴 박사학위와 관련해 “회사 지원 없이 사비로 등록금을 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논문에는 ‘박사학위 논문에 공무할 기회를 준 유병언 회장에게 감사드린다’는 별도의 감사인사를 썼다. 이 국장은 또 “사고 수사에는 전혀 관여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18일 당시엔 팽목항 상황실 자리를 자주 비우는 것에 대해 가족들이 항의하자 “제가 본청 수사도 같이 맡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즉 수사에 참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세모 근무경력과 ‘유병언 장학생’ 사실이 알려지며 경질된 이용욱 해경 정보수사국장. (출처=연합뉴스)



⑤청해진 해운의 실소유주로 지목되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누구인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은 청해진해운으로부터 약 10년간 매달 월급, 자문료, 퇴직금 등 10억여원을 직접 받은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청해진해운의 최대주주인 천해지가 직접 밝힌 내용에 따르면 천해지는 관계사 아해프레스에 지난해 164억원을 지급했다. ‘아해’는 사진작가인 유 전 회장의 예명으로, 아해프레스는 그의 사진작품 활동을 홍보하고 작품 전시 및 판매를 맡아왔다. 

유병언 전 회장은 교회 목사 출신이다. ‘기업이 곧 교회’라는 독특한 교리에 바탕해 1962년부터 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를 일군 인물이다. 교리에 따라 신도들은 임금을 거의 받지 않고 유병언의 소유기업을 위해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 전 회장은 1986년 한강유람선 운영권을 따내며 승승장구하다가 1987년 구원파 신도 32명이 공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검찰 수사에서는신도들이 자살한 것으로 결론났지만 타살설은 잦아들지 않았다. 유 전 회장은 교인들을 속여 돈을 가로챘다는 상습사기 혐의로 1992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세모그룹은 1997년 부도처리됐다. 

그런데 불과 2년만에 청해진해운이 설립됐다. 유씨의 두 아들이 최대주주인 지주회사 아이원홀딩스가 사실상 지배하는 것으로 돼있지만, 유병언 전 회장의 측근은 유 전 회장이 세금을 탈루하고 각종 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직원 명의로 청해진 해운의 주식을 차명보유하고 있다고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폭로했다. 그는 또 “유 전 회장은 여야 균형을 맞춰 정치인을 상대로 골고루 금품로비를 했다”면서 로비자금 심부름꾼은 현재 청해진해운 관련회사 임원으로 있는 모씨가 맡았다고 주장했다. 

유병언 전 회장의 일가는 검찰 수사 앞에 미적거리고 있다. 그의 장남 대균(44)씨는 각종 컨설팅비 명목으로 100억원 이상의 돈을 계열사로부터 부당하게 받은 혐의를 받고 있지만 12일 검찰소환을 거부했다. 


1일 오후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안산 사진공동취재단 =정동헌 기자



"최대한 뒤로 물러나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지난 4월 30일 오후 2시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공식 합동분향소. 자원봉사자들이 취재 라인을 뒤로 밀어내고 생존 단원고 학생들이 숨진 친구들을 조문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있다.



Q. 후진국형 대형사고, 후진국형 사고처리 무엇이 문제인가. 

①한국 사회는 국민 생명에 대한 가격을 ‘싸게’ 매기고 있다.

최소한의 안전을 강화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태도가 수십년 간 한국 자본주의의 잘못된 관행으로 자리잡아왔다. 이런 ‘신자유주의 적 사고판단’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서해훼리호 침몰을 비롯한 참사 때마다 ‘안전을 경시한 인재’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안전보다는 수익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생명보다는 돈이 우선이었다. 

한국의 산재 사망비율은 하루평균 5명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이다. 재개발로 용산 주민들이 죽고,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쌍용차 직원들이 죽어나가도 한국사회를 굴리는 돈의 논리는 그간 단 한 번도 꿈쩍한 적이 없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무심하게 돌아갔다. 

그 ‘돈의 논리’와 깊숙히 결탁한 관료와 무능한 당국이 결국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적나라한 현실 앞에 한국 사회는 묻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이 강고한 돈의 논리 앞에 안전할 수 있는 이는 과연 있는가. 질문은 이제 시작됐다.

②수습도 늘 국민의 몫이다.

한 학부모는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최소한 안전은 보장된 나라에서 살고 싶다. 한심한 정부, 한심한 관료, 한심한 행정, 한심한 사고처리,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조문행렬이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남겼다. 

한 누리꾼은 트위터에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뿐 아니라 관계자들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건 정부가 아니라 자원 봉사자들이고 임시합동분향소에서 진행을 돕는 이들도 정부 공무원이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다”라고 적었다.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심재준씨(45)는 “정부는 구조도 포기했지만 구호도 포기했다. 사복경찰이나 투입해 민간 자원봉사자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감시·사찰하고 있다는 데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IMF사태로 힘들 때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을 때 국민들은 열성을 다해 동참했다. 국가의 큰 위기에 닥칠 때 ‘자원봉사’자들은 늘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원래 정부가 채워야 하는 건 아닌지 국민들은 묻고 있다. 사고 수습 과정이 민관의 협력은 좋은 일이지만, 정부가 해야 할 기초적인 것까지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대국민 성금 모금’도 마찬가지다.

Q. ‘먹먹해진 한반도’ 치유를 위한 첫 단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신뢰를 잃은 국가는 사회적 구심점을 잃고 모래성이 되기 마련이다. 사건의 충격으로 한국 사회는 ‘집단 우울증’에 빠졌다. 

단 한명의 생명 구조 소식 없이, 현장에서 전해진 사연들은 온 국민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는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를 묶은 남녀 고교생 시신 2구가 발견됐다. 이들을 물속에서 처음 발견한 ㄱ씨(58)는 “어린 학생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고 괴로웠겠느냐”며 “나름대로 함께 공포에 맞서려고, 살려고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지난 4월30일부터는 진도 팽목항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 ‘몸단장을 하면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팽목항에 남아 있는 엄마들이 화장을 하고, 아빠는 진도 시내로 나가 이발을 하기도 했다. 

팽목항 가족대책본부 옆 선착장에는 음식 등이 놓인 두 개의 밥상이 있다. 실종자들을 위해 가족들이 차린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이 쌓이고 있다. 미역국과 하얀 쌀밥, 과일부터 피자와 햄버거, 컵라면, 과자, 탄산음료수 등 아이들이 평소 즐겨 찾을 법한 간식거리들도 가득 쌓였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민들이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가족을 기다리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해 줄 말은 길지 않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다음 생엔 더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사랑한다”, “기다릴게”. 시민들은 노란 리본을 달기 시작했다. e메일에도, 문자메시지에도 노란 리본이 달렸다.

‘어머니’들의 아픔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소화도 안되고 심장도 벌렁거리고 자꾸 몸이 처져요. 평생 울 눈물 다 흘리고 평생 할 욕 다한 것 같아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세월호 재앙은 균이 혈관을 타고 들어간 형국이고 사회 전체가 심리적 죽음에 이를 정도”라고 트라우마의 심각성을 말했다. 또 세월호 트라우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에 한국전쟁과 맞먹는 상흔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25일 밤 서울 세종로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민들이 여객선 세월호 참사를 원망하는 플래카드를 걸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김기남 기자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는 경기 안산 단원고가 24일 3학년 등교를 시작으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단원고 입구에 세월호 탑승자의 무사귀환과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다. /김기남 기자



세월호 침몰사고 21일째인 6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한 실종자 가족이 동생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며 가져다놓은 신발이 놓여 있다. 진도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의 방법은 무엇일까. 

정혜신 박사는 ‘국민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하면 좋겠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심각한 신경증이 있지 않다면 이 슬픔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길 권합니다. 우선 분향소부터 찾으시길요. 함께 슬퍼할 수 있으면 많이 슬프지 않습니다. 많이 힘들다면 혼자 슬퍼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진실발견과 책임소재의 명확화, 그에 따른 처벌과 배상이 먼저”라고 말했다. “책임질 자 탈탈 다 털고 나서 성금 모금을 하자”면서 “청해진해운 유병언 일가, 한국선급과 해운조합 등 안전관리사, 국가 등 책임 반드시 따져 철저하게 ‘배상’하게 해야 한다. 사상 최고의 배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국가나 기관, 법인 등이 ‘배상’하게 되면 그 배상의 원인인 개인 위법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게 된다”며 “책임있는 당사자들이 물어내라는 것이며 대통령부터 관제사까지 모든 책임공무원 책임만큼 구상해야 한다. 국민세금으로 모두 물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돕는 성금 모금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유가족들도 “투명한 사고 진위 파악이 먼저”라고 말했다.

한 외국 언론사의 기자는 한국에서 대형사고가 나면 장관을 경질하고 사람을 처벌할 뿐, 사고를 일으킨 근본 원인은 바꾸지 못하더라고 지적했다. "장관만 바뀌고 문제는 남더라"는 것이다. 사건에 닥쳤을 때 제대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안전전문가를 기르지 못한 우리의 시스템과 문화도 문제로 지적된다. 

과거에 그랬듯이, 이번 사건도 잊혀질 지도 모른다. 소시민의 안전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정부를 보며 우리는 '각자도생'을 꾀하고, 공동체는 붕괴할 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지금 위기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누가 이 사회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최민영 기자 min@ 
송윤경 기자 kyung@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