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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54] 감기와 우울과 피아노

 

 

 

요샌 많이 아팠다.

 

2011년 신종플루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죽을 듯이 기침이 나오고, 그와 함께 구토까지 나왔다. 배도 많이 당겼다. 갈비뼈도 아팠다.

서서히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서서히 악화되는 감기.

 

두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감기.

 

1월 30일에 결국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지만, 약의 성분이 아기에게 안좋을까봐 먹을까 말까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감기가 더 악화되는 게 더 서로에게 안좋다는 말에 일단은 먹고 있다.

 

1월의 경과를 보자면,

1월 초에 굉장히 심했다가, 중순쯤에는 많이 나아진 줄 알고, 영어 수업도 가고 스터디도 나가며 평소처럼 생활했지만,

1월 20일즈음 너머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심해지고 전에 없던 구토 증세까지 나타났다.

그래서 남편에 의해 침대에 갖혀버렸다.

집안일이나 요리 등은 물론 금지되었고 간간히 피아노 치거나 책을 읽는 거만 허락되었다.

조금 나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지난 주(1/28)에는 피아노 연습을 하던 중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쓰러질 뻔 했다.

거의 이틀동안 계속 어지러워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남편이 부축해주지 않으면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

나도, 남편도, 이 일로 너무나도 놀랐다.

남편은 나에게 정말, 진심,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만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당연히 피아노 금지령도 떨어졌다. 아예 금지. 잠깐 손도 못대게 했다. 이게 젤 힘들었다. ㅋㅋ

 

누워만 있는 것은 너무도 지겨웠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계속 보니 지겨웠다.

난 그저 피아노가 치고 싶었다.

아직 잘 치지도 못하는 왕초보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치고 싶었는데 일주일동안 꾸역꾸역 참았다.

 

피아노 치는 것이 체력을 꽤 많이 소모한다는데, 난 잘 몰랐다.

1월 이후부터는 거의 하루에 4시간 이상 쳐왔는데... 이러면 안되었었나 보다.

감기가 나으려다가도, 내 몸속의 나쁜 세포와 싸워야 할 체력이 피아노로 쏟아지니 오히려 계속 악화된 게 분명하다는, 남편의 설명.

 

침대 결박령 이후로 다시 몸이 회복되는 듯 했다.

좀 나아진 거 같아서 지난 토요일에 잠깐 차를 타고 한인타운에 가서 감자탕을 냠냠 맛있게 먹고 왔는데,

아 진짜, 그거 잠깐 나갔다 왔다고, 그새 목이 원상복귀되서 다시 내장을 쏟을 정도로 기침을 하고 먹은 것을 다 게워버렸다.

난 다시 침대에 감금되었다..-_-

 

누워서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책도 보고.. 그러면서 며칠을 보냈다.

그냥 듣기엔 천국같겠지만. 이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종일 누워만 있으니 온 몸에 힘이 더 빠지고,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지난 주부터는 미각과 후각도 기능을 상실한 상태.

맛있는게 먹고 싶긴 한데, 뭘 먹어도 맛이 안느껴지니, 내 하나 남은 자그마한 쾌락마저도 봉인된 거 같아 너무 슬펐다. 

정말 지겨워서 어제는 종일 기분이 쳐졌다. 많이 우울해졌다. 다행히 남편의 재롱으로 다시 기운을 찾아 책을 보았다.

 

어쨌든 1주일을 손가락 하나 까닥 않고 푹 쉬고, 약도 챙겨 먹었더니,

기침도 조금 잦아들고 코막힘도 많이 나아졌다.

아직 미각과 후각은 정상 상태로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그래서 오늘은 피아노를 조금 건드려보았다.

지난 주에 피아노 치다가 어지럼증이 온게 생각나서 오래 치기엔 살짝 무서웠다.

그래서 조금만 건드렸다가 한참을 쉬었다가, 또 쪼금 두드렸다가 다시 한참을 누워있다.

 

정말 신기한 게 뭐냐면, 피아노 한 10분쯤 쳤다고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는 거.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하다. 게다가 뭐 연주를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손가락 연습용 곡을 느릿느릿 쳤을 뿐인데.

피아노를 잠깐 치고 누워서 한참 음악 들으며 쉬다가 책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행복감이 마구 밀려왔다.

비록 아프지만 남편이 극진히 간호해주고, 영양가 좋고 맛난 것도 - 비록 맛은 잘 안느껴지지만 ㅠㅅㅠ - 많이 해 주고,

게다가 피아노와 책과 뱃속의 아기까지 있으니, 이런 행복이 또 어디 있으랴 싶었다.

 

어제의 우울증과 지금의 단 하나의 차이는 피아노일 뿐인데.

그만큼 이제 피아노는 내 삶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하다.

 

지금 쥐뿔도 못친다고 별로 기죽지도 않는다.

평균 수명도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내가 별로 늦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꼬맹이들보다 발전 속도도 느리겠지만 난 괜찮다. 느리면 느린 대로 하다보면 언젠가 되겠지. 내가 그 꼬맹이들보다 더 오래 살면 되지.

 

앞으로 꾸준히 연습하면 언젠가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정말로 기쁘다.

꿈이 손에 잡히는 기분? 말로 표현이 안된다.

 

 

 

감기 얼른 나아서 마음껏 연습하고 싶다.

 

 

 

#. 내 보물 1호.

YAMAHA U-1이다.

이렇게 비싼 무언가를 직접 사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한국에서도 피아노는 늘 있어왔지만, 그때와 의미가 많이 다르다.

디지털 피아노는 아침이나 밤에, 혹은 악보 초견용으로 그 가치가 있어서 이제 집에 피아노가 두대가 된 셈이다.

엄마한테 내가 다른 욕심은 없어도 피아노 욕심이 좀 있는 듯 하다며, 부산에 있는 내 피아노도 절대 팔지 말라고 했다. 

히히. 이제 난 피아노 3개 있는 여자다.

아이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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